미용실 원장님이 어떻게 해드릴까요? 하길래 그냥 짧게 잘라 달라했다. 근데 아무리 내가 그렇게 말을 하긴 했지만 이건 아니다. 그럼 짧게 자르겠습니다~ 하고 가위를 들이댈 때만 해도 네~ 했는데 막상 웃자란 잔디 깍듯 듬성듬성 잘라 낼 때는 아차 싶었다. 나는 “어~어~ 이건 아닌데 너무 짧은데... 머리숱도 많..
십 수년 전 집 뒤 산비탈 밭에 고구마를 심었다가 손님이 내려오는 바람에 망한 적이 있다. 여름철 고구마가 겨우 새끼손가락만 하게 달리기 시작했는데 손님이 어떻게 알았는지 고맙습니다(고구마 맛있습니다) 하고 내려와 파티를 하는 것이었다. 마당에 개가 5마리나 있었으니 조용할 리가 없었다. 밝을 때는 개를 ..
“칭구야~ 잘 지내나?” “웅~ 잘 지내” “니도 잘 지내제?” “그래~나도 잘 지내” 지리산 자락에 사는 나는 서울 사는 친구랑 오랫만에 통화하고 “그럼 잘 지내~”하며 끊는다. 친구도 잘 지내고 나도 잘 지내고 있다. 근데 친구가 잘 지내는 거하고 내가 잘 지내는 거하고는 조금 차이가 있다. 공무원인 친구..
장날에 난장에서 텃밭에 심을 모종을 사는데 종류별로 한개 두개씩 달라하니 모종 파는 할머니 큭큭 웃으신다. “아니~겨우 항개는 심어 뭐 할려고~” 아내는 미안한 마음을 헤헤 웃음으로 갈음하며 가지는 한개 오이는 두 개, 한두 개씩 주문한다. 재미로 심는 아내의 텃밭은 정말 없는 거 빼고 다 있다. 고추, 방울..
봄비가 오는 날은 부침개에 산사춘 한잔 하면 좋은데...이 말을 아내한테 하려고 하니 말이 “비가 오는 날은...” 까지 밖에 안 나온다. 나는 비가 오는 날은~ 비가 오는 날은~ 하고 두 번 말하다 말았다. 이심전심으로 알아들었으면 저녁에 농부는 술을 한 잔 할 것이고, 못 알아들었으면 따뜻한 밥에 뽕잎 순 무친..
지리산둘레길 옆에 살다보니 가끔 둘레꾼이 들린다. 지난 휴일엔 둘레꾼 여럿이 물 얻으러 왔길래 곶감 집에 오셨으니 맛이나 보고 가시라고 곶감을 내어 놓았다. 내가 직접 말린 곶감이라며 대봉곶감을 하나씩 권했다. 근데 일행 중에 부모 손잡고 온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초딩1?), 곶감 포장재에 쓰인 글씨를 읽..
요즘 내가 새로운 종교에 심취해 있음을 고백해야겠습니다. 맨발로 다니는 할머니를 교주로 모시는 신흥교파인데 타샤 튜더교입니다. 미국에서 건너왔는데 한국에도 신도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유일신인 지름신을 숭배하고 있지요. 오늘도 나는 기도하고 응답 받았습니다. (확 질러버리라... 네...) 새로 온 나리를..
반갑습니다~ 하고 손을 내밀 때 나는 앗~하고 상대를 알아보았다. 그런데 상대방은 나를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우리는 불과 두어 시간 전에 마주친 적이 있다. 읍에 있는 목욕탕에서였다. 그 사람은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열탕에서 얼굴만 내밀고 있었고 기분이 좋아서 음~ 하는 신음소리를 나지막히 내며 혼..
이거야 말로 하늘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내려와 양면 보자기를 휘릭 뒤집는 마술쇼가 아닐까 싶다. 춘분에 내린 큰 눈에 흔적 없이 사라졌던 크로커스가 마술처럼 다시 나타나더니 꽃을 활짝 피운다. 경이로움에 환호하고 박수를 치려다 엄숙하게 경배하게 되는 봄날의 매직이다. 지난 주 춘설에 올해 목련은 망했..
벌써부터 책장 정리 한번 해야지 해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엊그제 아내가 그 일을 시작했다. 수천 년 또는 수백만 년 자리만 차지하고 손 한번 닿지 않았던 책이 칠할 이상은 되어 보인다. 과연 아내가 먼지 폴폴 날리는 책을 한권 한권 내리는데 책장의 칠 할이 비었다. 일단은 시원하다. 사실 우리 집엔 책..
1. 사랑이 앞마당에서 함성이 점점 커지는데 내 귀가 다 멍멍할 지경이다. (내가 멍멍이라 나만 그런가?) 더는 참을 수 없다고 한다. 너도냐? 나도다! 이제는 밝혀야겠다는 목련의 미투. 앙다문 입술을 터트리며 하얀 세상을 만들겠다고 고백한다. 어쩔 수 없는 대세. 봄이 왔다. 네발의 장점을 뒤늦게 간파한 주인..
대학병원 관절전문병동 6인실. 좌측 침상에 누운 30대 젊은이는 나보다 이틀 뒤 나랑 비슷한 발 골절 수술을 했는데 2차 수술을 또 하게 되었다. 사진을 찍어보니 인대가 살짝 늘어나있어 재수술해야 한다는 거다. 엊그제 수술하고 꿰맨 자리를 다시 찢고 꿰매야 한다니 참으로 안타깝다. 한번 더 그러면 차라리 ..
“고마 막살놔 이 사람아~ 사람은 그냥 남 하는대로 해야 하는기라~” 내가 날씨에 따라 곶감 채반을 들고 하우스와 냉동고 사이를 왔다리 갔다리 하는 것을 보고 곶감 일을 도와주는 절터댁이 고개를 저으며 하던 말이다. 날씨 변화에 맞춰 곶감을 이리저리 옮기는 것은 곶감의 때깔을 곱게 유지하기 위해서다. 유황..
올 겨울엔 날씨가 좋다. 사실 가뭄이 이어져 내년 농사를 생각하면 결코 좋은 날씨라고 할 수는 없지만, 덕장에 매달린 곶감에게는 더 없이 좋은 날씨다. 올 겨울엔 눈비가 거의 오지 않아 곶감 말리기엔 더 없이 좋은 날씨였다. 덕분에 곶감은 예년에 비해 열흘 정도 빨리 말랐고, 이미 상당량의 곶감이 주인을 찾아..
나는 평소 술을 잘 안 마신다. 원래 술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술을 마시면 취하기 때문에 잘 안 마신다. 술을 마시면 반드시 취하는 거, 이게 내 약점이다. 수년 전에 친구가 놀러오면서 비싼 양주를 한 병 선물로 가져온 적이 있는데, 몇 년간 주방 진열장 구석에서 잠자다가 결국 내 입에 들어가기는 했다. 그리고 ..
가을의 꼬리를 밟으며 시작한 곶감 작업은 겨울 내내 이어진다. 그럴 수만 있다면 차라리 포근한 봄날이나 시원한 가을에 했으면 좋겠지만, 나에게 일 년 농사인 이 일은 유감스럽게도 추운 겨울이라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곶감이 호된 추위에 얼었다 녹기를 반복해야 제 맛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요가 구정 전..
아무리 일이 중요하다지만 새벽 5시에 일과 시작이라니... 그것도 첫눈이 내린 날에 말이다. 어쨌든 그날은 그랬다. 열이레 째 우리 집에서 감을 깎고 있는 절터댁 사정에 맞춰 그날 하루는 꼭두새벽 일찍 시작해서 일찍 끝내기로 했다. 힘든 하루가 될 것이었다. 요즘 곶감 작업 때문에 일찍 일어나기는 했지만 ..
그동안 나는 봉다리 곶감을 많이 팔아왔다. 곶감을 비니루 봉다리에 무게만 달아 저렴하게 실속포장으로 파는 거다. 그러면 포장비랑 인건비가 적게 드니 저렴하게 팔지만 누이 좋고 매부 좋다. 물론 선물상자에 담아서 판매도 하는데 상당량을 봉다리에 넣어 팔고 있다. 비록 봉다리에 도매금으로 들어가는 곶감이..
단풍이 절정일 때 엄천골 농부들의 곶감 작업은 시작된다. 하필 단풍이 절정인 이 시기에 곶감을 깎느라 고생하니 유감스럽기도 하지만 찬바람 불기 시작하면 마음은 급해진다. 상강 이후 무서리 내리고 이어 된서리, 장독 뚜껑 고인 물에 살얼음이 얼 무렵 곶감 깎는 사람들은 아이구 어깨야~ 하며 무거운 감 박스를..
곶감 깎을 철이 되어 며칠째 덕장에서 바삐 움직인다. 새봄맞이 대청소라도 하듯 살짝 들뜬 기분이 되어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지나간 시간의 찌꺼기를 씻어낸다. 감을 덕장에 주렁주렁 매달아줄 행거와 채반을 소독하고 칼도 잘 벼린다. 비록 손바닥 크기의 작은 과도지만 곶감쟁이의 청룡언월도다. 해마다 곶감 작..